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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 단풍보다 더 붉은 동학농민혁명의 자취



지난해 늦은 가을 서울의 한 지자체 문화원에서 주관한 역사탐방여행에 동행해 동학혁명 120주년 되는 갑오년에 동학혁명의 발상지인 정읍 일대의 관련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정읍에서 승차한 현지 문화해설사가 정읍에 관해 간단히 소개를 한다. 사람들은 내장산의 단풍이 곱다고 이야기 하지만 살아보니 내장산은 사계절 아름답다고 한다. 내장산은 국내의 어느 산보다 많은 종류의 단풍나무를 품고 있어서 가을이면 산등성이, 골짜기 할 것 없이 붉게 타오른다. 그 화려함에 이끌려 사람들이 물밀 듯 몰려오지만 단풍이 진 뒤 눈 덮인 내장산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외지 사람들은 모른단다. 또, 봄에 나뭇잎이 피어나 그 초록이 아직 충분히 진해지기 전의 부드러운 초록빛 산도 충분히 아름답고, 초목이 우거진 그늘 속에서 바라보는 산의 싱그러움과 풍성함도 가을 단풍의 멋과 비교할 만하다고 한다. 그녀는 내장산의 사계절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가을의 단풍만이 내장산의 전부인 듯 이야기한다고 아쉬워한다.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는 정읍은 또 작자도 모르고 지어진 연대도 모르는 백제가요 ‘정읍사’로 넘어가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를 지나 정읍의 특산물 이야기로 이어진다. 정읍엔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특산물이 거의 없다고 한다. 물이 풍부해서 우물 정(井)자를 쓰는 고을 정읍에선 모든 농작물이 다 잘된다. 모든 농산물이 다 특산품이니 어떤 작물 하나만 특산품일 수 없단다.


드넓은 땅에 가뭄 걱정이 없어 마냥 풍요롭게 보이는 정읍에서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일념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세상을 바꾸려 일어선 섰다는 역사는 역설적이다. 동학농민혁명이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났으니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이다. 그러고 보니 2014년도 갑오년이다. 문화해설사의 깔끔한 입담에 점차 잠이 깨고 도심을 벗어나니 참 들이 넓다. 버스가 가기엔 옹색한 길 끝에 도착한 곳이 고부면 신중리의 대뫼마을이다.
마을회관 앞마당에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서 있다. 이름 없이 목숨을 바친 동학농민군의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94년 건립했다고 한다.
오른 팔로는 죽은 동료를 끌어안은 채 왼손에는 죽창을 힘껏 움켜쥐고 앞으로 내뻗으며 목이 터져라 절규하고 있는 농민군의 모습이 새겨진 주탑이 있고 그 둘레엔 작은 돌기둥이 여럿 서 있다. 돌기둥엔 별다른 표정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있고, 죽창이 있고, 쇠스랑도 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섬뜩하다’고 느낌을 말한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김기범 등이 앞장섰던 동학농민군의 처절함과 절실함이 오늘 우리가 누리는 풍요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다만 섬뜩함을 느낀다. 아마도 민중미술을 주창하 던 예술가들의 작품이라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근처에 동학농민혁명 거사를 도모하며 사발통문을 작성한 송두호의 집이 있다. 1893년 11월 이 집에서 전봉준을 포함해 20명이 모여 ‘고부성 격파, 조병갑 효수, 탐관오리 징계, 전주성함락 후 서울 진격’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사발통문을 작성했다. 회벽에 기와를 얹은 깨끗한 집이었다. 처마 아래엔 당시 작성했던 사발통문을 깔끔한 붓글씨로 새로 쓴 액자가 걸려 있다. 가만히 살펴보니 원형으로 작성된 이름 속에 전봉준 석자가 보인다. 스무 명의 이름 속에 송 씨가 여섯 명이다.


이곳 주산마을에 있는 또 다른 기념물로 동학혁명 모의 탑이 있다. 뒷면에는 사발통문 작성에 참여한 20명의 이름과 그 후손들의 이름이 빼곡 적혀 있고 옆면엔 사발통문이 또 다른 면엔 이 탑 건립추진 경위가 추진위원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1969년 세웠다고 되어 있다.


동학혁명의 자취를 찾는 여행길이니 전봉준 고택은 가 보아야 할 곳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는데 먼저 눈에 띄는 초가집이 있다. 마당이 넓어 텃밭에 푸성귀가 자라고 초가지붕이 높은 근사한 집이었다. 알고 보니 전봉준 고택 관리인이 생활하는 곳이란다. 그 옆의 전봉준 고택은 지붕이 낮고 규모도 크지 않아 눈에 띄지 않았다. 전봉준이 동학혁명을 주도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농사일과 훈장을 하면서 근근이 살았다고 하는데 집을 보니 그 형편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동학혁명 당시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과 부패를 알렸던 말목장터는 당시 정읍, 부안, 태인을 잇는 교통의 중심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북적대던 모습은 사라지고 그저 조용하고 한산한 시골마을로 퇴락해가고 있었다. 당시 전봉준의 연설을 지켜보았을 감나무도 이미 오래 전 넘어가 기념관에 박제되어 있고 지금은 작은 감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렇게 녹두장군은 점차 옛날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되고 있었다.


만석보로 향한다. 멀리 지평선이 보인다. 김제에서 본 지평선 보다야 멀지는 않지만 단지 눈 앞 몇 미터 앞만을 보며 살던 도시인에게는 시원함 그 자체다. 만석보의 위치는 동진천과 정읍천이 만나 동진강이 시작되는 곳 근처다. 본래의 만석보가 있던 곳에 표시물이 있고 그 위쪽에 별도로 유적지가 조성되어 만석보의 유래를 전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엔 겨울이 코앞이었는데 아직 추수하지 않은 벼가 드문드문 보일 뿐 사람은 없다.
만석보와 조병갑이 단초가 되어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혁명은 정부의 군대를 상대로 한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동학의 조직을 기반으로 집강소라는 기구가 설치되고 이를 통해 주민들의 자치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희망의 불씨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조선 정부는 동학이 두려웠다. 조선을 개국할 때 위화도에서 회군한 군사의 수가 5만이 채 되지 않았고 중종과 인조는 불과 이천여명 남짓한 군사를 동원해 반정에 성공했다. 비록 남도지방이라고는 하나 동학혁명에 가담한 농민군의 수는 십만을 훌쩍 넘어 지속적으로 불어났고 이에 맞선 정부군은 목숨 바쳐 동학군을 상대로 싸울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던 것처럼 정부는 청에 지원병을 요청했다. 다른 점은 임진왜란 때는 내 나라를 침략한 다른 나라의 군대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엔 내나라 백성을 상대로 싸워달라고 외국에 지원병을 요청한 것이었다.
무능한 권력자들이 제 것 지키기에 바빴던 시절 농민들은 나라를 바로세우고자 일어났고 그 틈을 기회로 삼아 청과 일본이 들어와 그 백성들을 도륙하며 조선을 삼키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당시 조선의 총 인구가 1,300만 명쯤이었고 한양의 인구가 20만 명이었다는데 동학혁명 과정에서 40만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많은 백성을 죽음으로 내 몰고 조선은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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